대구양꼬치는 육즙이 풍부하고 기름이 많은 편이여서 향신료와 조미료를 잘쳐서 같이 먹으면 매우 맛있다. 양고기의 누린내를 제거하여 가족과 함께 먹으면 좋다.
한국에서는 적어도 부여시대 때부터 양을 사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주로 털 채집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고기는 종묘에 제사를 올릴 때 쓰거나 약용으로 사용되는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도 인류의 동물성 단백질 수요 충족에서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는 계란과 고기를 제공하는 닭이나, 양처럼 모피 채집이 가능한 소, 잡식성으로 사육되는 개 등에 비해서는 고기 공급이 드물었던 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다만 신라에서 자체 생산한 모직물로 된 양탄자 유물이 발견된 걸로 봐서 양 사육 자체는 확인되고 있다. 과거에도 몽골과 만주에서 양이 넘치도록 사육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철도, 비행기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니 대중화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 기록들 중 지배층에서는 양고기와 돼지고기, 개고기를 먹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되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의 사신 서긍이 서술한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에서는 사신을 접대할 때 개와 양을 잡아서 대접하는데 도축 기술이 엉망이라서 고기에 악취가 난다고 불평하는 서술이 나온다. 해당 기록에는 고려에서 동물을 잡을 때 절벽에서 떨어트리거나(...) 산 채로 다리를 묶어 불 속에 던져서 털을 제거한 이후 불을 끈 후에 동물이 만약 숨이 붙어있으면 몽둥이로 두들겨패서 죽인다고 나와있는데, 이렇게 도축 기술이 조잡했던 것을 보면 당시 양고기, 개고기에 대한 수요가 적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노획품 관련한 기록되어 여진족이 키우던 양을 얼마나 몇 마리를 노획했는지 관련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렇게 붙잡힌 양들은 대개 현지 군인들의 군량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 세종 조에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어의가 양고기를 처방하기도 하였다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기술되어있다. 이때 세종은 양은 조선에서 구할 수 없어 명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그 돈으로 더 많은 백성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양고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다만, 세종이 양고기를 전혀 안먹어본건 아닌데 세종 초기 영락제가 세종에게 잔치하라고 양과 거위를 하사하는 기록이 있으니 이때는 세종도 양고기를 맛봤을 가능성이 높다.[29]
공식적으로 사치와 향락을 금기시하던 유학의 나라인 조선에서, 노동력이나 계란을 제공해주거나 하다못해 오물처리를 해주고 키우는 것도 상대적으로 쉬운 소, 닭, 개에 비해 하루 종일 풀만 뜯는 데다 키우는데 손이 많이 가고 비용도 많이 드는 양은 좋은 취급을 받기 힘들었다.[30]
거기다 양을 먹이기 위해서는 서늘한 기후와 드넓은 목초지가 필요했는데, 한반도는 암벽투성이 바위산이 많아 목초지가 들어설 수 있는 평야가 적고, 장마 때문에 함부로 산을 깎았다간 산사태가 나기 쉬운 기후였다. 무엇보다 조선에서는 중앙의 방침에 따라 평야는 모두 곡식이나 채소 농사를 위한 농경지로 개간한 경우가 많았다. 결국 조선 전기 한반도에서 양은 거의 절멸됐으며, 세종 대부터 양고기는 비싼 돈 주고 중국이나 만주에서 수입해 먹는 것이 되었다.
그 이후 1960~70년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경공업 진흥 정책이 펼쳐지며 한국의 섬유 공업이 활성화 되었고, 이 시기 영국 등 서양계 품종의 서양 양들이 한국에 털양으로 유입되었다. 이때 양털을 얻고 더 이상 양털을 얻을 수 없는 늙은 성체 양을 도축해서 단체급식, 특히 군대에 식육으로 납품하거나 혹은 시장에 내놓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머튼은 노린내가 심한데, 현재도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다는 평을 듣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열악하던 당시 군대 취사반 상황에서 각종 향신료로 머튼에서 나는 노린내를 제대로 처리하기는 당연히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그 노린내 심하고 질긴 늙은 양을 먹어 봤던 이들의 증언이 양고기에 대한 국내의 부정적인 인식을 키우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언급은 한국군 병영식 문서에도 나와있다. 이후 양모 붐이 가라앉으며 양 사육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31] 질낮은 국산 양고기 대신 외국에서 들여온 양고기가 시장을 점령하게 됐다.